본문 바로가기

일상에서 만나는 심리학

학폭에 신고하고 싶어요

반응형

상담 교사 했을 때 가끔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있다. 당사자 입장에서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오는 사건인데 제삼자인 나는 미소 짓는 일화로 기억한다.


사춘기 청소년 상담

 

나는 여자 중학교에서 상담 교사로 일했었다. 전교생이 750명쯤 되었을까? 내가 근무했던 학교는 그 도시에서 꽤 학군이 좋은 곳에 위치했었다. 자녀들을 입학시키기 위해 이사까지 올 정도로 학부모들이 탐을 내었다. 

 

나는 연 년생 아들 둘을 키운 엄마이다. 이 문장 하나로 나의 성향과 치열했던 육아 전쟁을 가늠할 수 있다. 그런 내가 여중에서 상담 교사로 일했다는 것은 매일 사리 한 가마씩 쏟아 낼 정도의 인내심과 성격 개조까지 필요했다.

 

질풍노도 사춘기 중학교 여자 아이들을 대하는 것은 정말 섬세한 보살핌과 따스한 사랑이 필요했다. 또한 허벅지가 시퍼렇게 멍들 정도로 꼬집으면서 그들의 말을 경청하고 공감해야 하는 극도의 인내가 필요한 극한직업이었다. 나는 그들을 맞이할 때 간과 쓸개를 멀치 감치 떼어 놓고 시작한다.

 

어느 날 아침에 영업(?)도 시작하기 전에 단골(?) 손님이 씩씩 거리면서 상담실 문을 박차고 들어 왔다. 난 이럴 때 그들이 정말 무섭다. 오늘은 또 어떤 이야기로 시달림을 당할까 하는 생각에 속으로 떤다.ㅋ


에피소드

 

나: 00야, 안녕~ 잘 지냈어?

학생: 아뇨!!!!! (한눈에 봐도 아닌 거 같다 ㅠ). 선생님, 저 00 이를 학폭에 신고하고 싶어요! 

(뭣이라~~~~ 학폭(학교폭력)에 신고하고 싶다고!!!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단어이다. 학폭이 신고되면 일단 학폭 담당선생님에게 알린다. 담당자선에서 처리가 되지 않으면 학교 자체 학폭위원회가 소집이 되고.....) 

나: 음.... 어떤 일로 신고하고 싶을까?

학생: 00 이가 저한테 무 다리라고 놀렸어요! 다리도 굵은 애가 치마를 짧게 입었다고 하면서 언어폭력을 했어요!!!! 

 

나: (푸하하핫 할 뻔했지만 정신을 바짝 차렸다) 아~~~ 그렇구나!!! 참 속상했겠구나!  얼마나 네가 화가 났으면 아침 일찍 선생님을 찾아왔을까!! 선생님도 그런 얘기를 들었으면 참 속상했을 거 같아.  음.... 궁금한 게 있는데 00 이가 왜 너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 선생님이 알기로는 둘이 친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00: 네, 맞아요. 둘이 친했는데 얼마 전에 싸웠어요. 싸우기 전에 제가 00 이한테 얼굴이 호박 같다고 놀렸더니 00 이가 저한테 무다리라고 했어요. 그런데 싸우고 나니 갑자기 그 말이 생각이 나고 화가 나서 00 이를 학폭에 신고하려고요!

 

나: (참 나!!!! 뭐래!!!! 사춘기 아이들은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충분히 이렇게 말한다) 음..... 친할 때는 농담으로 받았는데 싸우고 나니 그 말이 생각이 나서 화가 난 거구나! 선생님이 학폭을 신고해 줄 수는 있는데 (일단 피해 학생이 원하면 신청을 하도록 되어 있다) 한 가지 생각해야 되는 것은 너도 00이 얼굴이 호박 같다고 놀렸기 때문에 00 이도 너를 신고할 수 있다는 것이지.

 

00: 앗....................(급 얼굴의 수심이 가득 몰려온다)

나: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음..... 그래도 네가 원한다면 선생님이 신고할게~~~ 

00: 선생님....... 생각 좀 하고 다시 올게요~~~


점심시간에 선생님들하고 식사하면서 아침에 벌어진 에피소드를 나누었다. 평소 한마디 말씀도 없이 식사만 하시는 과묵한 역사 선생님이 한 말씀하시는데 너무 웃겨서 밥알 세례를 퍼부을 뻔했다.

 

"학폭 신고하면 지 다리가 무 다리라고 전교생에게 광고하게 되는 것이지!"


가끔 그녀들이 그립다. 쉴 새 없이 와서 고자질하고, 싸우고, 울고, 징징거리고, 쫑알대고..... 상담실을 단골 떡볶이 집 찻듯이 무시로 와서 늘어놓는 그들의 한(?) 맺힌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영혼이 탈탈 털려 기력이 쇠하기도 했다.

 

지금 그 아이들은 대학생이겠지! 그녀들의 인생 한 꼭지에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우산 쓴 소녀 사진
그녀들의 우산이 되어 준 상담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