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rca에서 알베르게 주인의 따뜻한 환대는 걷느라 지친 우리 몸과 마음에게 평안한 안식처를 마련해 주었다. 4명이 머무는 방에 우리 외에는 다른 순례자는 없었다. 그동안 적게는 한 방에 열명에서 몇 십 명씩 함께 머무는 숙소에 있었기 때문에 남편과 나만 덩그러니 있는 방은 낯설었다. 알베르게 주인이 우리 방에 한 명만 더 받는다고 했는데 누가 맞은편 침대의 주인이 될까 궁금했다.
순례자의 정체성
남편과 필요한 물품을 사러 마을로 들어갔다. 마을도 작았지만 식료품점도 정말 작았다. 지금이 오렌지철인지 올망졸망한 오렌지들이 양파망에 옹기종기 촘촘히 모여있었다. 가격도 너무 착했다. 큰 양파망에 가득 찬 오렌지가 겨우 5유로라고 한다. 배낭만 없다면 짊어지고 이어지고 가고 싶을 정도로 욕심이 났지만 우리의 현주소는 그렇지 않기에 마음을 내려놓았다. 길을 걷다가 사고 싶은 거나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어도 늘 우리의 정체성이 순례자인 것을 잊지 않고 마음을 접었다. 그것을 잊여버리는 순간 모든 것은 짐이 되어 우리의 발걸음을 더 무겁게 하기 때문이다.
순례의 길을 걷다 보니 욕심이 점점 없어진다. 매일 등에 이고 가는 배낭의 무게도 감당하는 것이 버거워서 아침마다 무엇을 버릴까 고민하는 마당에, 거기다 무언가를 더 얹는다는 일은 사치이고 과욕이었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잠깐 지구라는 공간을 빌려서 이 땅에 왔다. 언젠가는 우리가 온 곳으로 다시 되돌아가야 한다. 이 세상에서의 소유가 많을수록 미련이 많아 떠나기가 어렵다. 특히 나이 들수록 비우고 가벼워져야 한다. 몸무게마저도 말이다.
스위스 할머니
장을 보고 돌아오는데 알베르게 입구에 긴 하얀 머리에 작고 아담한 키를 가진 할머니가 담벼락에 기대어 담배를 뿜어댄다. 우리는 그녀에게 미소와 함께 "알로" (스페인어로 안녕)라고 짧은 인사를 던지면서 숙소로 들어갔다.
숙소에는 순례자가 여기저기 산만하게 여장을 풀어놓은 흔적이 보인다. 남자 순례객인가 했는데 좀 전에 숙소 입구에서 만난 담배를 뿜어 대던 할머니가 우리 방으로 들어온다. 비록 하룻밤 인연이지만 한 식구가 된 것 같아서 반가웠다. 나는 이층 침대에 올라가 그녀가 짐 푸는 것을 지켜보았다. 역시 순례자답게 최소한 필요한 것만 갖추었다. 그런데 그녀의 몸을 보니 성한 곳이 없었다. 온 곳에 파스가 붙여져 있었고 발가락 하나, 하나에는 하얀 테이프가 휘감겨 있었다. 한눈에 봐도 그녀의 여정이 나와는 수준 차이가 확연함을 느꼈다. 당연히 나의 궁금증이 발동했다. 궁금하면 물어야지!
나: 많이 걸었나 봐요!
할머니: 어! 1,000km 이상 걸었어
나: 뭐라고!!!! 말이 돼요?
할머니: 우리 집은 스위스야. 집에서부터 걸어왔어. 산티아고 출발 지점인 프랑스 생장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1,000km를 걸었더라.
순례길을 걸으면서 할머니처럼 말하는 유럽 순례자들을 가끔 만났다. "집에서부터 걷기 시작했다"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는데 그런 류의 사람들을 종종 만나면서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주로 젊은 남자였는데, 한 눈에도 할머니는 꽤 연세가 있어 보였고 더군다나 가냘픈 몸을 가지고 상상하기 힘든 숫자를 걸었다니! 경이로웠다.
나: 왜 걸어요?
스위스 할머니가 걷는 이유
스위스 할머니는 70에서 두 살이 부족한 68세다. 그녀는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니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 은혜의 감사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기도하고 고민하다 산티아고 길을 걷기로 결정했다. 매일 길을 걸으면서 자신의 인생을 지키고 보살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고백'으로 보은 하기로 마음의 결단을 내렸다. 그녀는 자신의 결심을 가족들에게 나누었다. 자신은 딸만 있는데, 딸들이 놀라면서 "엄마, 미쳤냐!"라고 하면서 다른 방법으로 그의 은혜에 보답하라고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대로 순례의 길을 강행군했단다. 심지어 막내딸은 울고불고 떠나는 날까지 엄마의 고행을 포기하지 못했다고 한다.
아!!! 감동이 밀물이 되어 순식간에 내 영혼을 가득 덮친다!! 이제껏 순례의 길을 걷는 이유를 듣는 사연 중에 가장 압도적인 스토리였다. 아름답다 못해 숭고하다는 마음이 올라왔다. 내 눈에 물이 고여 호수를 만들고 그 호수물은 그녀의 맑은 영혼을 반사해 내고 있었다.
집에 돌아갈 때는 어떻게 갈 거냐고 묻자, 먼 길을 걸어왔는데 비행기 타고 가기에는 너무 아쉽고 몇 날 며칠 버스를 타고 가면서 자신이 걸어온 길을 묵상하면서 갈 거란다. 아~~~~ 왜 이렇게 멋있는 거야!!!
할머니와의 대화는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생생하게 내 기억 속에 살아 있으며 힘들 때마다 그녀의 고백을 기억하며 감사함으로 살아내려고 몸부림친다.
나는 순례의 길을 걸으면서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은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 자연 풍경도 압도적이었지만 저마다 사연을 안고 험한 여정을 떠나는 그들의 발걸음은 고단한 삶을 향해 몸부림치는 아름다운 날갯짓이었음을 깨닫는다.
오늘따라 유난히 산티아고 길에서 스쳐 가며 만난 이들이 생각나고 그립다. 이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지내는지.... 할머니는 살아 계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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