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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스페인 산티아고길을 걷다

산티아고를 걷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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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orca 입성

한낮에 뜨거운 태양을 정면으로 맞이하면서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니 작은 마을의 시작점을 알리는 푯말이 입구에서 순례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Lorca이다! 일단 마을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숙소를 찾는 일이다. 보통 순례의 길을 떠나기 하루 전날에 그다음 행선지를 정한다. 얼마나 하룻길을 갈 것이며, 숙소는 어디로 정하려는지 등을 계획하고 잠자리에 든다. 그다음 날, 여기저기 쑤신 몸뚱이와 한 몸이 된 배낭을 등에 업고 목표한 길을 떠난다.

 

길의 소실점인 마을이 보이기 시작하면 발걸음이 빨라지고 내 머릿속에는 숙소를 빨리 찾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다. 우리는 가격이 매우 착한 공립 알베르게에서 숙식했기 때문에 조금만 늦게 가도 자리가 없다. 산티아고 길을 걸으면 마음이 느긋해질지 알았는데 이 병적인 조급증은 조금도 수그러지지 않음을 보게 된다. 


경쟁이다! 속세에서 하던 것들을 순례의 길에서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너덜너덜해진 영혼을 돌보겠다는 마음은 진즉에 하늘로 승천하고 좀 더 싼 숙소를 찾기 위해 다른 순례자들 보다 앞서 뛰어가는 나를 본다.

 

목표한 20km 걷기가 끝날 무렵이면 다리의 감각도 없어져 손에 쥐어진 스틱을 의지해 겨우 한 걸음씩 내딛는데 마을만 가까워지면 경보 선수처럼 걸음이 빨라진다. 내적 평안과 여유는 찾아볼 수 없고 욕심이 덕지덕지 붙은 내 실존을 보게 된다.

 

거기다 머릿속은 삶의 기본 욕구에 충실히 하느라 쉼 없이 가동된다. 어디에서 머물러야 하는지, 알베르게 숙박비 계산, 순례의 길에 들렸던 카페에서 마신 커피값이 어제보다 쌌는지 아닌지, 오늘 마트에서는 얼마를 써야 하는지,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무엇부터 할 것인지 등 영혼을 챙기거나 마음을 돌볼 여유가 전혀 없다. 정신적 에너지 소모가 오랜 된  핸드폰 배터리가 급 방전 되듯이 피곤함이 토네이도 처럼 휘몰아쳐 온다. 


내가 걷는 이유

나는 왜 걷지!

산티아고 걷는 내내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내가 여정을 떠난 이유는 조각조각 찢여져 너덜 해진 내 영혼을 챙기고 치유받고 싶어서였다.  또한 그동안 일상에 치여서 나의 존재감을 잊고 살았다. 걸으면서 나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고 나를 지으신 창조주의 뜻이 무엇인지 묵상하기 위해 길을 나선 것이다. 그토록 열망하던 길을 걸으면서 깨달았다. 걷는 이유는 그럴듯한데 실제로 걸어보니 나의 이상과는 먼 개소리였다는 것을 알았다.

 

인간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구실과 명분이 필요하며 그것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이다. 나에게는 길을 떠날 명분이 필요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팔자 좋게 놀러 간다'는 인식과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내 심신이 갯벌에 빠진 것처럼 질척인 것도 맞았다. 상처받은 영혼에 대한 치유도 절실히 필요했다. 그래서 내가 단순히 놀러 가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런데 정작 걷기 시작하면서 기대한 나의 모습은 땅으로 꺼져 버리고 매일 '헐 거 벗은 나'를 대면했다. 마치 겉은 그럴듯하게 포장이 잘 되어있는데 뜯고 보니 매우 실망스러운 것처럼 내, 자신이 그랬다. 남편 하고는 하루가 멀다 하고 티격태격 거리면서 마음은 지옥 구덩이가 되었으며, 매일 생존적으로 살아내야 하는 순례의 길은 나의 조급증을 더 부채질하는 격이 되었다. 


나는 왜 걷지!

한 달간의 여정을 마무리하면서도 얻고 싶은 명확한 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길을 걸은 지 6년이 지난 지금, 글을 쓰면서 왜 그 길을 걸었는지에 대한 질문의 답을 찾아내었다.


회피 방어기제

'회피'였다!

여행은 나의 취미이자 소확행이자 회피의 도구였다. 내가 속한 공동체, 더 거시적으로는 한국에서 멀리 벗어나고 싶었다. '사람풍경'이라는 심리 여행 에세이를 쓴 김형경 작가는 회피는 "위험하거나 고통스러운 감정, 상황, 대상으로부터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행동이다'라고 했다. 결국 회피는 자기 자신과 삶으로부터 멀리 도피하는 방어기제이다. 상황과 대상과 맞서 대항하는 대신 나는 안전한 '회피'를 택했다.

 

그래, 맞다. 내가 제일 행복하고 안정감을 느끼는 시간은 혼자 내 방에서 내가 좋아하는 작업들을 할 때이다. 또한 아무도 모르는 낯선 땅에 내 던졌을 때도 불편함은 있지만 불안하지는 않았다. 이제야 알았다. 왜 여행을 좋아했지에 대해서 말이다. 비로소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여행은 종교의식처럼 나에게 심리적 방어의식이었다. 나는 사회적 기술이 그다지 발달되지 못해 관계에 대해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관계의 어려움이 오면 그것을 뚫고 나갈 용기는 없고, 내면의 고통과 직면하기는 너무 괴로워서 혼자만의 공간을 찾거나 여행을 선택했다.

 


예전에 '나 때는' 이런 말이 있었다. '청소차 피하려다 똥차 만난다'. 방어기제 '회피'에 아주 적합한 말이다. 직면해야 될 것을 피했을 때 더 큰 어려움을 만나게 된다. 이제야 이해가 된다. 회피로 떠난 산티아고 여행은 오히려 헐벗고 굶주림 나의 영혼의 실존을  보게 해주는 시간이었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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