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 계획
예수님 재림만큼 절실히 고대하던 여름 방학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뉴질랜드 여름방학은 보통 12월 둘째 주부터 시작해서 2월 초순까지 거의 두 달 가까이 보낸다. 방학이 시작되면 기숙사를 비워주는 것이 원칙인데 딱히 갈 곳이 없으면 기숙사비를 내고 있어야 해서 무조건 그곳을 탈출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아는 지인을 통해 Raglan(라그란)에서 7주 가까이 머물 수 있는 집을 기숙사 가격으로 구하게 되었다. 라그란에서 2달러 샵(우리나라의 다이소 같은 상점: 뉴질랜드 어느 도시를 가든지 있다)을 운영하는 한국인 부부가 기꺼이 그들의 1층 공간을 우리를 위해 렌트해 주셨다. 그것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너무 착한 가격으로 말이다! 나는 답례로 그 집에 거하는 동안 주인장 부부와 한참 사춘기인 그들의 자녀들을 위해 마음을 모아 기도했다.
라그란(Raglan)
Raglan(라그란)
라그란은 해밀턴 서쪽에 있는 마을로 인구는 약 삼천명정도 되는데 관광철이 되면 2만 명 넘게 관광객들로 인해서 도시 전체가 축제 분위기다. 3개의 유명한 서핑 해변과 아름다운 자연환경이 있는 이곳은 유명한 서핑 장소, 예술 및 공예, 패션, 카페 및 레스토랑으로 유명하다. 라그란(Raglan)은 또한 많은 예술인들에게도 매력적인 도시여서 도시 곳곳에 예술 전시 공간들이 있으며 다양한 엔터테인먼트 공연이 펼쳐지는 활기찬 도시이다.
라그란은 surfer(서퍼: 서핑하는 사람)들의 천국이자 평생 한 번쯤은 오고 싶어 하는 관광 마을이다. 해변에 나가면 쉽게 서핑보드를 옆에 끼고 걷는 관광객들을 접할 수 있으며, 단기 서핑을 가르쳐 주는 학교도 있다. 안타깝게 우리 부부는 수영도 할 줄 모르고 서핑은 두말할 것도 없이 그림의 떡이었다.
그렇지만 매일 저녁 식사후 남편과 해변을 끼고 산책하는 시간은 힐링이자 소확행이었다. 또한 석양이 질 때쯤 바라보는 라그란의 풍경은 영화처럼 아름다운 장면들을 연출해 내었다.
Raglan(라글란)에서의 일상
남편과 나의 일상은 고무줄 씹는 것만큼이나 지루하고 맛도 없고 단조로웠다. 하지만 나는 이런 일상이 즐겁고 행복했다. 학교밖에 있다는 그 자체로 해방감과 자유로움을 동시에 누릴 수 있었다.
나이 들어 한국말도 아닌 영어로 늦깎이 공부를 해내는 것에 엄청난 스트레스가 컸다. 또한 일 년 동안 학교에서 기숙사 생활하면서 매일 눈만 뜨면 종일 봐야 하는 학생들과 스텝들 보는 것이 지겹기도 하였다. 변화가 필요했는데 감사하게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더불어 좋은 집에서 호사를 누리는 축복된 시간을 보냈다.
라그란 해변의 풍경
매일 일과 중에 하나가 남편과 산책 겸 운동을 하는 일이었다. 어느 날 해변을 따라 걷는데 썰물 때인지 모래사장이 훤하게 민낯을 다 드러내었다.
썰물로 쓸려 간 자리에는 오묘한 빛깔의 크기가 다양한 조개껍데기들의 무덤도 보였으며, 한편에서는 파도에 수만 번 부딪쳐서 부서진 조개의 파편들이 모래와 섞여 반짝였다. 또한 썰물 때를 기다렸던 갈매기와 물새들은 머리를 모래 바닥에 처박고 조개 사냥에 몰입 중이었으며 낚시꾼들은 썰물이 빠져간 자리 끄트머리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었다. 부모들과 나들이 나온 아이들은 수영을 하거나 물놀이 장난감을 가지고 즐겁게 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평화로운 풍경이 그 넓은 모래사장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었다.
풍성한 식탁을 제공한 조개들의 희생
잠시 걷는 것을 멈추고 우리도 신발을 벗어 들러 매고 그 풍경 안으로 들어갔다. 발이 모래에 파 묻히면서 발가락에 울퉁불퉁한 것이 감지가 된다. 발가락을 조물 거리니 조개가 잡힌다. 신기했다. 티브이에서만 봐 온 조개를 이렇게 손쉽게 잡을 수 있다니! 본격적으로 모래밭을 쑤셔대기 시작하자 조개들이 무더기로 나온다. 일가족인지 크기별로 조란조란 모여 있다. 조개 잡이에 집중하고 있는데 바닷새가 말을 걸어온다. "밀물이 몰려오고 있다고 조심하라"라고 내 주위를 열심히 맴돈다. 조개 채취하다 바닷속에 매장될 뻔했다.
해변입구 표지판에 적힌 안내문이 생각이 났다. '일인당 조개를 종류별로 잡을 수 있는 개수가 정해져 있다'. 키위(뉴질랜드인을 지칭함)들은 사람이 보든 그렇지 않든 법을 잘 준수한다. 우리도 그들의 법을 존중하며 개수를 세어가며 조개를 채취했다. 채취한 조개는 그날 저녁 우리의 식탁을 풍성하게 빛내주었다. 바지락 칼국수를 끓여 뱃속을 시원하게 풀어줬으며, 남은 것은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 요리 할 때 투척했다.
자연과 사람이 질서와 조화를 잘 이룬 라그란의 풍경은 머무는 내내 힐링의 시간이었으며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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