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렸을 때 밖에 나가면 극 내향의 아이였다. 수줍음이 많아 사람들 앞에서 입을 떼는 일이 너무 부끄러웠다. 내가 말을 하면 나만 쳐다볼 것 같은 두려움이 컸던 거 같았다. 그런 내가 집에 오면 전혀 다른 아이로 변했다. 집은 안전하고 평안하다고 느꼈던지 나의 끼가 그대로 드러났다. 특히 가끔 숨겨진 장난기를 볼 때마다 내 머릿속에 엉뚱한 도깨비가 살고 있다는 생각을 간혹 했다. 어렸을 때 장난기를 부린 에피소드들이 떠오른다.
외할머니에게 사기 치기-에피소드 1
어렸을 때부터 외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내가 대학 다닐 때쯤 할머니는 거동을 잘 못하셨고 누워계신 시간들이 더 많았다. 부모님은 맞벌이 중이셨고 오빠와 동생은 집에 붙어 있는 시간보다 바깥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집순이인 나에게 자동적으로 할머니를 보살펴야 하는 업무가 주어졌다.
어느 날 방학 때 무료하게 집에서 마른 생선 말리듯이 방바닥에 누워 엎어졌다 뒤집어졌다를 하던 중 누워계신 할머니의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카락이 내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할머니의 머리를 다듬어 주고 싶은 충동이 거세게 올라온다. 내 안에 살고 있는 엉뚱한 도깨비가 나를 충돌질 시킨다. 방바닥을 박차고 벌떡 일어나 주무시고 계신 할머니를 깨워 말을 건네었다.
나: 할머니, 머리 잘라 줄게~~
할머니: 다리에 힘이 없어 미용실까지 못 가~
나: 아니, 내가 잘라 줄다고!
할머니: 네가 어떻게 잘라? 너는 미용사도 아니잖아
나: 아니야, 나 얼마 전에 미용 자격증 땄어!
(눈이 침침해진 할머니에게 학생증을 내밀며) 자! 봐봐~~ 내 얼굴 보이지? 여기 미용사 자격증이라고 쓰여있잖아!
할머니: (미심쩍은 표정을 보이시며) 그래?! 그럼 한 번 잘라봐
할머니에게 어울릴 최신 유행하는 머리 스타일을 생각하며 노련한 솜씨를 발휘해 그녀의 머리를 싹둑싹둑 서슴지 않고 끊어 내었다. 다 자른 후 거울을 할머니에게 보여 드렸더니 우신다. 그 당시 유행하던 영구머리 스타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할머니의 바뀌신 헤어스타일을 보신 부모님은 화가 많이 나셨고 나는 뒤지게 야단맞았다.
자살소동 - 에피소드 2
할머니는 몸이 쇠하시면서 정신까지 맑지 못하셨다. 혼자 계신 것을 두려워하셔서 늘 당신 옆에 나를 두고 싶어 하셨다. 내 방에 있으면 꼭 나를 부르셨다. 그게 너무나 성가신 나는, 엄청 성질을 부렸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ㅠㅠ 아~~~ 지금 생각하면 후회가 막급한데, 그때는 젊은 나이인 내가, 할머니 뒷수발을 들어야 한다는 억울함이 커서 악다구니 쓰는 것으로 나의 감정을 표현했던 거 같다.
할머니가 자주 내뱉으신 말씀은 "늙으면 죽어야지!"라는 말씀과 함께 나한테 "먹고 죽는 약 좀 사다 달라"라고 부탁(?)하셨다.
할머니: 00야 약 좀 사다 줘. 먹고 죽게. 너도 그만 귀찮게 하고 싶어.
나: 할머니, 진짜 죽고 싶어?
할머니: 어, 늙으면 죽어야지. 약 좀 사다 줘.
나: 할머니, 약 사가지고 올게 조그만 기다려~~
불현듯 저 말씀이 진실인지 알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서, 내 안에 잠자고 있던 엉뚱한 도깨비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바깥에 나가는 척하고 현관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고 살금살금 부엌으로 약을 제조하러 향했다. 일단 짱구를 돌렸다. 어떻게 약을 제조해야 될지에 대해 눈동자를 돌리며 뇌를 작동 시켰다.
먹고 죽는 약 만들기
재료:
1. 종이컵으로 따뜻한 물 반 컵
2. 커피가루 큰 두 스푼
3. 소금 작은 한 스푼
4. 미원 큰 1/2 스푼
5. 간장 작은 한 스푼
6. 멸치 액젓 작은 한 스푼
제조법
; 모든 재료를 뚜껑 있는 플라스틱 용기에 넣고 칵테일 바텐더처럼 오른쪽, 왼쪽 리듬을 타면서 '쉐키쉐키' 마구마구 이리저리 흔들어 준 후 준비한 바카스 빈용기에 옮기기
냄새를 맡아보니 걸레 썩은 냄새와 구토를 유발하는 하수구 시궁창 악취가 올라온다. 맛은 굳이 볼 필요가 없고 패스~~
(약국에 다녀오는 척을 하기 위해 현관문 열고 닫기 하기)
나: 할머니, 약 사 왔어~~~ 약 드세요
할머니: (설마 하는 표정으로 나를 싸하게 쳐다본다) 진짜야?
나: (약병을 내밀면서) 어, 약사한테 이야기했더니 이거 드시면 바로 하늘나라 간다고 하던데~~~
할머니: (주저하시고 망설이시더니 결단을 하시면서 비장한 표정을 보이신다) 줘봐~
잠깐 주춤하시더니 약병을 입에 대시고 한 모금 들이키시더니 바로 우엑 하시면서 내뱉으셨다. ㅋㅋㅋㅋ

아~~~ 하필이면 새로 한 지 얼마 안 되는 벽지에 약을 토해내시면서 세계 지도 한 장을 그려내셨다 ㅠㅠ
아~ 이로써 할머니의 '죽고 싶다는 '말씀은 새빨간 거짓말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 후에 내가 치러야 할 대가는 컸다. 이번에는 부모님이 제대로 화가 많이 나셔서 정말 뒤지게 혼났다. 할머니를 골려 먹어서 화가 나신 건지, 새로운 벽지를 엉망으로 만든 게 속상하신 건지~ 지금도 아리까리하다.

나이가 50대 중반인 요즈음도 가끔 내 안에 잠자고 있는 도깨비가 꿈틀거린다. 예전에 남편 잘 때 새끼손가락에 새빨간 매니큐어를 칠했다가 잠에 깬 남편이 경악한 적도 있었다. 그 당시 남편이 너무 미워서 복수로 손가락에 봉숭아 물을 들여 줄려다 사회생활하는데 지장이 있을까 봐 대신 매니큐어를 발랐는데 감히 나를 흘려본다. 지금도 가끔 남편을 골려주고 싶은 충동이 올라온다. 언제쯤이면 내 안에 있는 도깨비는 착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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