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뜻하지 않는 재앙인, 코로나로 인해 강제적으로 격리된 삶을 살아야 했다. 하지만 코로나가 풀린 이후에도 혼자 집에 있는 것을 자발적으로 즐기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자발적 집순이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을 즐겼다.
집순이의 일상
집순이 뜻
집순이는 신조어로 밖에 나가서 보내는 시간보다 집에서 지내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영어도 집순이 단어가 있어 신기했다. ' a homebody'로 사전적 의미는 " a person who likes to stay at home, especially one who is persceived as unadventutors"로 설명되었다. 즉, "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데, 특히 모험심이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뜻한다. 음... 영어의 눈여겨볼 단어는 특히(especially)가 따라붙었다. 한국의 집순이 단어 정의하고는 차이가 보인다.
집순이 삶의 소확행
나는 이 신조어가 생기기 전 어렸을 때부터 자발적 집순이였다. 위의 오빠와 아래 여동생과는 달리 집에서 보내는 시간을 즐겼다. 나 때는 토요일에도 학교 수업이 있었다. 물론 다른 요일보다는 수업 시간이 짧게 4교시로 마쳤다. 나는 토요일을 올매불망, 메시아가 이 땅에 오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처럼 기다렸다. 수업이 마치면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빛의 속도로 집을 향해 달려갔다.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중요한 할 일은 TV를 시청하는 거였다. 집에 가자마자 TV앞에 딱 붙어 앉아서 채널 사수를 했다. 나 때는 말이다~ 리모컨이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인간 리모컨이 되어 아바마마가 어머니가, 오라버니가 명령하는 대로 채널을 바꾸어야 했다. TV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내했다. 나의 소확행 중의 하나였다.
특히 말이다~~~ 나는 토요 명화를 끔찍이 좋아해 놓치지 않으려고 부단한 애를 썼다. 내 기억으로는 토요일 오후 12시 이후부터 TV 시청이 가능했다. 주로 오후 프로그램은 그전 주 드라마 재방송과 지나간 명화를 재방영했다. 영화와 드라마를 보는 시간은 내 삶의 태산 같은 즐거움이자 에너지 자원이었다.
일요일 아침에는 만화를 방송했다. 아~~~~ 하필이면 교회 가야 하는 시간에 만화가 시작되었다. 그 당시 유행하던 일본 만화 영화 '캔디'를 볼 수 없다는 원통함에 주님을 무지 원망했다. 학교에 가면 온통 캔디 얘기뿐인데 아그들과 대화가 통화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주일은 순교를 각오하고 교회 가는 것을 저항했지만 목숨도 걸기 전에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오마니의 한 말씀이었다. 그 한 말씀에 나의 비장한 각오를 철회해야 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럼 학교도 가지 마!"~~~~~~~~~~~~~

지금 생각해 보면 "학교 가지 말라"는 말씀이 참 반가웠을 말이었다. 왜냐면 나는 학교 다니는 것을 끔찍이 싫어했기 때문이다. 음..... 하지만 나 때는 지금처럼 홈스쿨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안학교라는 단어조차도 없던 시절이어서 "학교를 가지 말라"는 말은 끔찍한 형벌처럼 느껴졌다.
"학교도 가지 마"라는 그 한 마디에 난동이 제압된 후, 나는 주님이 계신 교회로 내 발걸음을 옮겨야했다. 마치 수용소에 끌려가는 기분으로 교회로 향했다. 무지 우리 주님을 원망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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