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생장 마을에서 시작한 순례의 길은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 근처 피레네 산맥을 넘어 론세스바예스에서 첫 여정을 풀게 된다. 론세스바예스에는 스페인 북부 나바라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여러 개의 아름다운 성당이 있으며, 론세스바예스 전투로 알려진 도시이다. 전쟁 후 프랑크 왕국의 황제 샤를마뉴가 죽은 자신의 병사들을 애도하기 위해 가톨릭 무덤을 만들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하지만 적군과 아군을 구별할 수 없어서 병사들의 옷을 모두 벗겨 놓았는데, 이를 본 샤를마뉴는 하나님께 자신들의 병사에게는 증표를 달라고 기도하자 죽은 시체의 입에서 장미가 피어나서 그들을 따로 분리해서 매장했다고 한다. 론세스바에스 마을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장미의 계곡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1400m의 고지인 피레네 산맥을 넘는 일은 생각보다 고되고 힘들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약 27km의 장거리를 오로지 내 발로만 내디뎠다. 피레네 산맥의 정상을 찍고 론세스바네스로 가는 내리막길은 악명이 높은 길이었다. 경사가 매우 가팔랐으며 (우회에서 돌아가는 완만한 길도 있다) 돌들이 깔려 있어 미끄러질까 조심조심하면서 온몸에 힘을 주고 내려왔더니 다리가 심하게 휘청거렸다. 이때부터 내 몸은 한계에 도달했는지 여기저기서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남편은 점점 뒤처지는 나를 뒤로하고 의리 없이 먼저 가버렸다.
내 한 몸 추스리기 어려울 정도로 휘청거리며 양손에 쥔 스틱을 의지하면서 산길을 내려오는데 외국 할머니가 가슴 앞에는 작은 가방을 메고 산더미 같은 가방은 등에 매고 휘청거리면서 내 옆을 지나간다. 할머니의 등에 맨 가방이 얼마나 무거운지 엉덩이까지 내려왔다. 길을 걷다 만난 일행 중, 남자 한 분이 할머니에게 “가방 좀 들어줄까요”하고 물었다. 할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배낭을 낯선 이에게 맡긴다. 나도 할머니가 안쓰러워서 작은 배낭을 메어 주겠다고 했다. 할머니는 무거운 배낭에서 해방되자 그 발걸음이 새처럼 가벼웠다. 연세가 6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할머니가 혼자 산티아고 길을 걷는 것에 대해 궁금증이 발동했다. 궁금한 것은 묻는 것이 예의다!
나: 왜 걸어요?
할머니: 나는 2년 전에 남편과 같이 산티아고 길을 걷기로 약속했었어. 그런데 작년에 남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났어. 매일 남편을 그리워하면서 슬픔으로 일상을 보냈지. 그러다가 남편과 산티아고 길을 걷기로 약속한 것을 기억하고 그 약속한 것을 혼자라도 지키기 위해 나 혼자 길을 나선 거야.
나는 미국에서 온 청년을 만났을 때 느꼈던 것처럼 영국 사람인 이 할머니도 ‘아름답다’고 느꼈다. 저 나이에 혼자 걸을 용기가 있다는 것에 놀라웠고, 자신에게 닥친 삶의 위기를 순응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살아내는 모습이 감동으로 다가왔다. 할머니는 잔잔한 감동을 우리에게 남기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우리는 잠시만 할머니 짐을 나누어지려고 했는데 얼떨결에 할머니 배낭은 고스란히 우리의 차지가 되었다.
갑자기 할머니가 순식간에 사라지자 함께 동행한 일행은 걱정이 되었다. 할머니가 혹시 길을 잃고 다른 곳으로 가시지 않았나 하는 염려가 있었다. 그러나 그 걱정은 우리가 머물 예정인 론세스바예스 수도원 도착하자마자 사라졌다. 여기저기 호기심 어린 눈을 가지고 건물을 살피고 있는 영국 할머니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또 한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나를 버리고 가버린, 의리 없는 남편이었다! 워낙 수도원이 넓고 사람도 많아서 찾기는 쉽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감사했다! 이 기회에 헤어져서 따로 여행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만신창이가 된 몸뚱이를 이끌고 저녁으로 라면을 끓여 먹으려고 주방에서 냄비를 찾고 있었던 중에 저 멀리 테이블에 앉아 있는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했다.
남편이었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쓸어내리면서 남편에게 다가갔다. 남편은 고개를 떨구고 무언가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스포츠였다! 남편은 스포츠 광이었다. 그날도 미국 메이저리그의 경기가 있었던 날이었다. 나를 버리고 간 것이 스포츠 때문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니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라면 끓이려고 들고 있던 냄비로 뒤통수를 내려 칠 뻔했다.
나는 그 짧은 찰나에 이성을 챙겼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나는 교양 있는 여자다! 여기서 내가 난동을 부리면 일단은 국가 망신은 그다음이고 우리 둘 다 개망신이지!’라는 판단이 섰다. 그러나 화가 나는 감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어떻게든 내가 엄청 화가 났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온몸에 있는 정기를 눈에다 다 모으고 남편을 아주 힘껏 쏘아봤다.
아~~~ 이때부터 우리의 전쟁은 시작되었다. 나는 살면서 ‘이혼’이라는 단어를 별로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여행 내내 사람들이 ‘이혼’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이렇게 배려 없는 남자와 함께 살았다니! 하는 생각이 드니 서글펐다. 남편은 남편대로 내 눈빛에 충격을 받았는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예전에 읽었던 책이 기억난다. ‘부부가 은혼식을 기념으로 세계 일주 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평소에는 서로 금실이 좋은 줄 알았는데 여행 내내 서로 맞지 않아 싸우고 돌아와 이혼했다’는 이야기이다.
이혼이라는 단어는 나와 상관없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내 가까이 와 있었다. 꿈에 그리던 산티아고 길은 첫날부터 ‘이혼’이라는 단어로 얼룩졌다. 그날 나는 후회했다! 내가 왜 산티아고 여행을 남편과 같이 왔을까! 하고, 그리고 힘들 때마다 되물었다. 왜! 왜!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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