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세스바예스 수도원
우리는 론세스바예스에서 힘겹고 고된 순례의 길 1일 차를 마쳤다. 늦게 도착한 탓에 수도원 밖의 컨테이너 박스에 숙소가 배정되었다. 한 컨테이너 박스에 8개의 이층 침대가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가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다들 자려고 불을 끈 상태라 무언가 하기가 어려웠다. 겨우 세면도구와 갈아입을 옷만 챙겨서 샤워실로 향했다. 샤워실도 역시 컨테이너 박스였다. 저녁 밤공기는 매우 차가웠으며 샤워실은 겨우 한 사람이 서 있을 정도로 좁았으며 더러웠고 물줄기는 약했다. 그나마 뜨거운 물이 나오는 것에 감사했다. 아!!! 괜히 왔나 봐! 샤워하는 내내 후회가 밀려들어왔다. 컨디션이 안 좋았는지 며칠째 하혈을 계속하고 있었다. 건강도 안 좋고 남편 하고는 계속 부딪히고, 거기다 첫 날밤 묵은 숙소는 최악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우리 둘만 덩그러니 남고 모두들 일찍 짐을 꾸려 떠났다. 전날에 날이 저물어 도착해서 주변 탐색을 못했는데 아침에 본 론세스바예스 수도원은 아름다웠다. 수도원 건물은 오랜 역사의 흔적이 느껴졌으며 위엄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다음 행선지가 있어 오래 머물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면서 마을을 탐색했다.
Espinal에서 호사를 누림
다음 목적지인 Jubiri를 향해서 발걸음을 떼는데 비가 오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햇살이 비춘다. 입었던 우비를 접어서 배낭에 넣었더니 잠시 후 진눈깨비가 쏟아지면서 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친다! 순식간에 사계절을 만났다. 컨디션도 안 좋고 몸살 기운도 있었다. 더 이상 가는 것은 무리여서 중간 마을인 Espinal에서 쉬기로 결정했다.
안내 책자를 보고 Irugoiena라는 알베르게를 찾아갔다. 분명 안내 책자에는 하루 숙박비가 10유로로 적혀 있는데 일인당 25유로를 내라고 한다. 예상하지 못했던 가격에 당황하고 고민이 되었지만 큰 마음 먹고 여기서 일박하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숙소를 보는 순간 '쉬워 가기를 잘했다'! 는 생각을 했다. 숙소 내부는 2층으로 되어 있는데 손님이 없어서 우리가 1층 전체를 다 쓰게 되었다. 널찍한 부엌에 응접실과 샤워실, 침실 모두 대 만족이었다.
Espinal, Navarre
Espinal, Navarre는 론세스바예스에서 6.5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Espinal은 매우 작은 마을이지만 동화 속에서 볼 수 있는 집들과 곳곳에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는 곳이다. 이 지역의 송어가 유명하다. 대부분의 순례객들은 피레네 산맥을 넘은 후 론세스바예스에서 일박을 결정한다. 그러나 간혹 좀 더 일찍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한 순례객들은 욕심을 내어 Espinal까지 걸음을 재촉해서 여기서 일박을 하는 경우도 있다. 보통의 Espinal은 Zubiri를 가기 위해 스쳐 지나가는 마을 정도로 여기는데 개인적으로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이곳, Espinal에서 일박하기를 권한다.
헝가리 사업가
오후에 저녁거리를 마련하러 식품점에 가는데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여전히 진눈깨비는 사정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드문드문 순례객들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낮에 눈여겨본 식품점을 가려면 작은 사거리를 지나쳐야 된다. 찻길을 건너는데 반대편에서 길을 건너오는 낯선 이와 마주쳤다. 나는 한눈에 그가 순례객인 줄 알아봤다. 50대 초반쯤 보였을까? 그도 추운지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걷고 있었다.
나: 순례객인가요?
남자: 네, Jubiri로 가고 있는 중이에요.
나: 지금 가기에는 날씨도 춥고 너무 늦었어요. 날씨도 추운데 하룻밤 쉬었다 가세요~
남자: 쉴 만한 곳이 있나요?
나: 제가 머물고 있는 숙소가 깨끗하고 좋아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내가 호객 행위하는 줄로 알 것이다. 어쨌든 이 남자 순례객은 우리가 묵고 있는 숙소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나는 그를 저녁 식탁에 초대했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통성명을 했다.
그는 헝가리 사람으로 글로벌 농약회사에 다니고 있는 중견 사업가였다. 그의 취미가 "바둑이라고" 하자 남편의 눈이 커진다. 남편 역시 취미가 바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헝가리에서 바둑학원을 다니면서 기초를 다졌다고 한다. 공통 취미가 있는 두 사람은 서로 죽이 맞아 신나게 바둑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나의 관심사는 달랐다. 나는 궁금했다. ‘왜 산티아고 길을 왜 걷는지!’에 대해 물었다. 그는 ‘자기 회사에서 만든 농약 제품들이 많은 곤충들을 죽였다고 한다. 거기에 대해 속죄하는 마음으로 순례의 길을 걷는다’고 했다. 참! 순례의 길을 걷는 사연들도 다양하다.
그는 저녁 초대에 대한 답례로 Bar에 가서 포도주를 사겠다고 한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작은 레스토랑이었는데 이른 초저녁인데도 사람들이 꽤 북적였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밤에 포도주 한 잔의 낭만!
포도주가 한 병에 3유로 정도 였다. 정말 싸다! 하긴 론세스바예스에 있는 한 레스토랑에서는 물 대신 포도주가 음료로 나온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헝가리는 유럽 중앙에 위치해 있지만 아시아 기마민족, 유목민 마자르족이 세운 국가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헝가리 사업가와 잘 통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단 신장이 크지 않고 외모는 동글동글하게 인심 좋은 이웃 아저씨처럼 생겼다. 그는 우리에게 명함 한 장을 건네주면서 헝가리에 올 일이 있으면 연락하라고 한다. 자신은 앞으로 10년 정도 헝가리에서 사업을 더 할 계획이며 나머지 인생은 자연보호와 관련된 기관에서 자원봉사로 일할 계획이라고 했다. 여전히 그의 마음에는 자신의 회사에서 만든 농약 제품들로 인해 죽은 생물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가득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진눈깨비가 휘몰아치는 저녁에 뜻하지 않게 헝가리에서 온 사업가와 포도주 한 잔을 기울이며 Espinal에서 따스한 추억의 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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