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뉴질랜드에서 2년 간의 유학 생활

Lockdown (럭다운)

반응형

 2년(2020. 2 ~ 2022. 1) 간의 뉴질랜드 살이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제일 힘들었던 문화 적응은 '마스크 착용'이었다.

 

1. Lockdown

 

뉴질랜드는 일찍이 코로나가 확산되기 전에 국경 봉쇄를 했던 나라였다. 발 빠른 국경 봉쇄에도 불구하고 오클랜드에서 환자수가 점 점 늘어나자 뉴질랜드 정부는 바로 '럭다운(Lockdown)'에 들어갔었다, 다른 나라들의 코로나 환자수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숫자에 비해 정말 점 하나 찍는 것만큼도 안 되는 숫자인 29명이 발병되었을 때 뉴질랜드 매스컴은 연일 비상대책을 내놓았다. 나중에 그들의 야단법석이 납득되었다.

 

뉴질랜드는 국민 GNP에 비해 의료시스템이 열악하고 의료 수준이 낮은 나라이다.  그래서 코로나 환자가 늘어나면 그들의 의료 시스템으로는 감당이 안되고 나라 전체가 혼돈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빠른 조치를 취한 거다. 더군다나 뉴질랜드는 섬나라이기 때문에 전염병에 대해서 더욱더 민감했고 노인 인구가 많은 땅이었다. 하여간 나는 2년 동안 마스크 없는 청정지역에서 고통당하는 이웃들에게 죄송할 만큼 호강을 누렸다.

 


어쨌든  첫 해 코로나 초기에 5주 정도 기숙사에 갇혀서 지냈었다. 아~~ 그때 참 힘든 시간이었지만 정말 귀중한 체험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야말로 '가택 연금(Lockdown)'이었다.

 

예전에 TV 뉴스를 보면 가끔 '정치인들이 가택 연금을 당했다'는 기사가 떴었다.  나는 그때 '그게 무슨 벌이냐!'라고 생각했는데 갇혀 보니, 무서운 형벌인 것을 알게 되었다. 인간의 자유를 강제적으로 빼앗고 사람들과는 단절된 생활을 하며 제한된 곳에서만 살아야 하는 삶은 극형이었다.

 

자발적 집순이인 나도 처음에는 강제적으로 삶의 영역이 제한되고 차단되니 숨이 막히는 증상이 왔었다. 스스로 고립된 것과 타인에 의해 차단이 되는 삶의 차이가 얼마나 다른지 체험한 시간이었다. 그나마 감사하게도 나는 학교 캠퍼스 안에 있는 기숙사에 살아서 삶의 반경이 넓었었다. 그럼에도 사람들과의 교제나 유일하게 나의 숨통을 튀어주는 마트 나들이를 하지 못하는 답답함이 커서 초창기에는 우울감이 높았었다.


2. 비대면 수업 (Zoom)

 

아~~~ 거기다가 수업은 비대면으로 한다고 했다. 학기 초창기라 대면으로 수업을 해도 어려운데 비대면 수업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그러면서 선생님이 "'줌'을 준비해야 된다"라고 하는데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도대체 '줌'이 뭘까? 하고 고심했다. 그때 왜, 나는 '줌(zoom)'이 컴퓨터 주소 창 오른쪽에 박혀 있는 돋보기 아이콘이 연상되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당당하게 선생님에게 이야기했다.

 

: 나 돋보기 없어. 그래서 사러 가야 되는데 럭다운이어서 밖에 못 나가!

(나는 그들 앞에서 늘 당당했다! 그 당당함은 영어를 제대로 못 알아듣고 내가 이해한 대로만 해석해서 받아치는 무식한 용기에서 나왔다)

선생님:???? (당황한 표정이 역력하다) 줌은 네가 사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에..... 쉴라 쉴라 쉴라~~~~~

: (뭐래!) 어쨌든 나는 줌(돋보기)이 없어서 수업 못해!

(나는 줌이 수업 시간에 필요한 준비물 중의 하나인 줄 알았다. 영어를 못하는 것과 정신분열의 증세와 비슷한 점이 있다고 한다.  과대망상이다! 혼자 상상의 나래를 끝도 없이 펼치고 소설 한 편씩 너끈하게 출시하는 능력을 소유한다. )

 

선생님은 억장이 무너지셨는지 조용히 밖에 나가시더니 잠시 후 영어 잘하는 한국 학생을 데리고 와서 통역을 시키셨다. 그런데 말을 알아 들었다는 기쁨보다는 화가 났다. '지독한 것들! 그렇게 해서라도 수업을 해야 되나! 생명이 위급한 이 시기에 정서적 안정과 신체적 안전을 먼저 생각해야지!' 하면서 그들을 비난했다. 그렇지 않아도 학기 초창기에 영어에 대한 스트레스가 산 같아서 쉬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lockdown이어서 수업을 안 할 것이라고 기대했었다. 슬프게도 나의 바람은 연기가 되어 하늘로 승천해 버렸다.


나는 비대면 수업이 시작되면서부터 매 수업 때마다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주여, 부디 인터넷이 끊기게 하여 주옵소서" 어찌 된 일인지 나의 신실하신 주님은 즉각, 즉각 응답을 하셨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결과이다. 왜냐면 전체 학생과 스텝이 동시에 인터넷을 사용하니 용량이 모자라서 자주 버퍼링이 되었고 끊겼다. 가끔은 70이 다 돼 가는 선생님에게 뻥도 쳤다. "안 들려~~~~~뭐라고~~~~~" 그리고 나는 화면 속에서 당당하게 사라져 버렸다.


3. 인생의 lockdown

Lockdown 이 처음 시작 되었을 때는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했는데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이 생활이 익숙해지니 즐기게 되었다. 평소에 하고 싶었지만 시간의 여유가 없어서 미루어 두었던 넷플리스 영화 보기, 책 읽기, 좋아하는 유투버 강의 듣기 등 혼자 즐길 수 있는 놀이가 다양했다. 또한 한편으로는 중생들하고 얽히지 않으니 마음의 평안함이 쓰나미 같이 몰려왔고 불필요한 정신적 에너지 소모가 없어서 행복감까지 느꼈다. 나중에 가금이 해제될 때는 해방감만큼이나 아쉬움도 함께 왔다.


우리는 뜻하지 않는 인생의 고비들을 순간순간 만난다. 언제 '인생의 럭다운'을 만날지 모른다. 신은 한쪽을 닫으시면 다른 쪽을 열어 놓는다고 하신다. '사면초가'여도 위는 뚫어져 있다고 하지 않는가! 예상하지 못한 인생의 lockdown이 왔을 때  당황과 좌절과 막막함, 절망 가운데서도 신이 열어 놓은 다른 쪽 문을 발견하는 여유가 내 삶에 있으면 좋겠다.

 

그리스 메테오라 수도원- 높은 바위 위에 세워진 고립된 수도원
세상과 고립된 그리스 메테오라 수도원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