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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일상에서의 깨달음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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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글란 피시 가게에서 여름방학 한 달 꼬박 세프로서 열심히 일을 했다. 나는 정규직이 아니었기 때문에 매일 근무하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았고 직원들의 근무 상황 따라 달라졌다. 보통은 일주일 전에 스케줄이 나오지만 늘 변수가 생기기 때문에 딱히 고정된 근무시간 없이 매일 유동적으로 일했다. 나의 주된 업무는 세프로 일했지만 매장의 전체적인 일도 하나, 둘씩 익혀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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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란(Raglan)에서 세프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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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로 주문받은 생선과 감자, 10 가지 정도의 사이드 메뉴들을 튀겨내는 일을 담당했다. 일을 끝내고 집에 가면 기름 냄새가 옷 속을 뚫고 고이 숨겨둔 속살까지 침투했다. 내가 일했던 가게는 뉴질랜드 안에서도 꽤 소문이 난 곳이었다. 휴가철이면 발 디딜 틈도 없이 매장 안에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손님으로 넘실거렸다. 환풍기를 종일 돌려도 하루에 튀기는 재료의 양이 꽤 되었기 때문에 계속 불 앞에 있어야 하는 나는 고스란히 그 기름 냄새를 온몸으로 감내해야 되었다.     


직원들의 점심시간은 따로 없고 손님이 드문 시간을 틈타 각자 먹고 싶은 것을 요리해 먹는다. 나는 처음에는 뉴질랜드에서 요식업을 운영하는 주인들은 인심이 후하다고 생각했다. 알고 보니 여기 같은 곳이 드물단다. 보통은 스스로 점심을 해결하거나 자비로 식사를 사 먹는다고 한다. 어쨌든 내가 일하는 레스토랑에서는 각자 기호에 맞는 메뉴를 정해 취향 것 요리해서 먹는다. 나는 주로 튀김용으로 손질해 놓은 싱싱한 돔을 그릴에 구워 소금, 후추 간을 해 요리하거나 신선한 야채를 곁들인 피시버거를 퇴근할 때쯤 만들었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남편에게 맛 보이게 하고 싶어 내 몫으로 요리한 음식을 포장해 갔다. 


그래! 나는 이렇게 마음이 갸륵한 아내이다. 병든 남편을 위해 수발을 드는 거라면 더 눈물겹겠지만, 그저 집에서 선비 놀이하는 남편을 위해서도 내 끼니마저 양보하고 봉양하는 아내이다. 비록 열녀문까지는 아니어도 플래카드 정도는 달아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남편은 내 끼니를 다 먹고 요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품평한다. 이럴 때는 남편의 머리털을 다 뽑아 대머리로 만들어 주고 싶지만, 나는 신앙인이자 교양인이고 현모양처이기 때문에 성질을 무질서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나는 온몸에 있는 기를 눈에 모아 아주 강렬하게 쏘아붙인다. 나의 불꽃같은 눈을 감지한 그는 잠시 움찔한다. 사실 이것 가지고 성에 차지 않는다. 마음 같아서는 얼굴에 오선지를 그려 주고 싶고, 입에서는 불을 뿜어내고 싶은 충동이 아주 강렬하게 끓어오른다. 

힘도 과시하고 싶다.

 


나이 들수록 부부 관계가 더 친밀해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는데 완전 개뿔이다. 젊었을 때 내가 꿈꾸는 노년의 모습 중 하나는 사진처럼 부부가 다정하게 손을 잡고 도란도란 정겨운 대화를 나누며 길을 나서는 것이었다. 뒤늦은 나이에 수없는 시행착오 속에서 얻은 것은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전 우주가 동원되듯이 아름다운 동행을 위해서는 서로 평생 노력하고 이해하고 용납해야 함이다. 수고와 고통 없이 저절로, 자동적으로 좋아지는 관계는 없음을 지천명 중반에 깨닫는다.

 

 

노년의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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