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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스페인 산티아고길을 걷다

Zubiri에서 만난 모녀를 또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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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ana의 허름한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입구부터 음산하더니 내부도 어둑 침침하고 마을도 회색빛이다. 날씨가 스산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컨디션 때문인지 마음이 마루 바닥까지 꺼지는 느낌이다. 하여튼 오늘 더 걷는 것은 무리가 될 듯싶어 여기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반갑지 않은 발걸음을 숙소 안으로 들여놓는데 이 이역만리에서 우리를 환하게 반겨준 이가 있었다. 쥬비리(Zubiri) 공립 알베르게서 나를 울린 모녀를 여기서 또 만날 줄이야!!!! 벌써 우연한 만남이 3번째다. 만남이 잦다는 것은 그녀들도 우리와 보폭이 비슷하다는 뜻이다.

 

2023.01.01 -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스페인 산티아고 길을 걷다] - Zubiri에서 나를 울린 모녀

 

Zubiri에서 나를 울린 모녀

Espinal에서 충분한 쉼을 가진 우리는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감사하게도 순례의 길 이후에 계속되었던 하혈도 그쳤다. 처음에 순례의 길을 계획할 때 우리의 목표는 순례의 길 800km 완주였다.

hasim2002.tistory.com

 

밥으로 인연이 된 관계이니 밥으로 회포를 풀어야지!!! Viana는 이제껏 만난 어느 마을보다도 정말 규모가 작은 마을이었다. 눈을 열심히 비비면서 식료품 점을 찾으러 마을을 몇 바퀴 돌았지만 찾지 못했다. 알고 보니 바로 알베르게 옆집이 식료품점이었다. 너무나도 소박한 아주 작은 가게여서 우리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나 보다.

 


한국 순례자하고 물물교환해서 얻은 라면 수프에 참치, 양파, 감자를 넣고 얼큰한 찌개를 끓였다. 거기다 반찬으로 순례자의 주 단백질 공급원인 계란 한 줄을 모두 투척해 계란찜을 만들었다. 식탁 왼쪽 투명 유리볼에 한가득 담아 있는 음식이 계란찜이다. ㅋ 닭 트림이 올라올 정도로 먹다 먹다 지친 남은 계란찜은 아이의 엄마가 플라스틱 통에 챙겨 넣었다. 이제는 요령이 생겨 밥과 남은 음식을 용기에 넣고 다닌다고 한다.

 

알베르게에서 만난 모녀와 밥 먹는 사진
밥으로 하나 된 끈끈한 관계

 

저녁을 일찍 감치 끝낸 젊은 순례객들은 달리 할 일이 없으면 bar(바)에 가서 포도주나 맥주를 기울이면서 교제를 나누다가 늦은 저녁에 숙소로 돌아온다. 남편과 나는 주로 마을 한 바퀴를 어슬렁 거리거나 혹은 각자 침대에서 볼일을 보다가 잠에 빠진다.

 

하지만 오늘은 남편이 큰 마음먹고 아이와 보드게임을 해준다. 남편은 묵뚝뚝해서 아이들에게 살갗게 해주는 성격이 아니다. 그럼에도 웬일인지 이 아이는 남편을 잘 따른다. 아마 아빠의 정을 모르고 자란 아이는 정이 그리워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남편을 '오빠'라고 불러서 뒤로 자빠지는 줄 알았다. 더 재밌는 것은 '오빠'라는 호칭이 싫지 않은지 남편은 마다하지 않는다. 남편은 50 대 후반에 할아버지라는 호칭을 들어야 할 나이에 졸지에 어린 여동생이 생겼다^^

 

 

연년생 아들 둘만 치열하게 키운 나는 거의 전사 수준의 엄마였다. 나 역시 살가운 성격이 못된다. 남편이나 나나 여자 아이를 대하는 게 참 낯설다. 그런데  이 아이를 자주 만나다 보니 딸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느새 정이 들었나 보다.

 

 

보드게임중인 남편 사진
여동생과 함께 보드게임중~

 

비롯 Viana 마을과 숙소는 별 감동을 남기지 못했지만 뜻하지 않은 두 모녀와의 만남과 함께 한 시간이 소중한 추억으로 가슴에 새겨지는 하루의 여정이었다. 공간의 기억은 화려함이나 편안함도 있지만 '누구와 함께 있었나' 가 기억을 소환하는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 사진을 보니 오늘따라 두 모녀가 무척 그립고 보고 싶다. 잘 살고 있겠지?

 

푸른 밀밭을 지나고 있는 산티아고 순례자들
가끔 광활한 밀밭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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